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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공(承旨公) 휘 진덕(進德, 1387 ~ 미상, 진주강씨 박사공파 8세) 묘산(墓山) 전의비문(傳疑碑文)

  합천군 북쪽 보림촌(寶林村) 동감성(東甘城) 묘좌(卯坐)에 상하로 조그만 봉분이 둘이 있는데 이 묘소들은 군수(郡守) 강공()과 그 아드님 현감공(縣監公, 휘 貴孫)의 체백(體魄)이 묻힌 곳이다. 그동안 후손들이 이 묘소들을 대대로 지켜오고 있으며 몇 대 선조이며 어느 할아버지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제일 위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군수공의 아버지이신 승지공의 묘소라고 전해지기는 하는데 가첩(家牒)에는 믿을 만한 기록이 없고 다만 옛날 노인들이 전해준 이야기일 뿐인데 이 이야기를 모두가 옳다고 하기도 어렵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타나 있는 증거라도 찾아 보고져 하였으나 전부터 묘소가 어디에 있다는 기록도 없다. 그렇다고 남의 산소를 함부로 파보는 것도 신중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의심나는 것이라도 전하기 위해서 두 묘소 계하(階下)에 삼사 척()의 비석을 세우려 계획하고는 나에게 분수 넘치는 글을 청하였다.

  살펴보니 승지공은 휘가 진덕(進德)이고 자는 자수(子修)이다. 공목공의 큰아들이신 동북면도순문사 휘 회백(淮伯)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1427(40)에 세종대왕이 궁궐에서 친히 보인 과거에서 호조좌랑(戶曹佐郎, 속기사)의 직에 있으면서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시강원(侍講院, 왕세자의 교육과 학문지도) 필선(弼善, 4)과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3) 등을 지내고 좌부승지(左副承旨, 승정원 소속 정3품 당상관)겸 지제교(知製敎, 왕에게 교서 칙령 등을 짓고 올리는 일)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문화유씨이시다.

  큰아들 군수공(郡守公) 휘 민()은 여산군수(익산시 여산면 일대)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광주노씨이시다. 큰손자 현감공 휘 귀손(貴孫)은 비안현감(의성 비안 일대)을 지냈는데, 전배(前配)는 숙인 금성유씨 이시고, 후배(後配)는 숙인 보성오씨이시다.

  아! 우리나라의 문헌들은 임진왜란 때 거의 없어졌다. 쇠로 된 독이나 석실에 넣었던 집에서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였는데 사가(私家)에서 보관하던 문헌들이야 어떻게 보전하여 증거로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보전하고 있던 문헌들의 여덟 아홉은 전해지지 못하니 사람마다 조상없는 사람이 없지만 고증할 수가 없어 모두가 한탄하는 지경이다.

  그래서 우리 강씨도 선조님들의 휘자(諱字) 묘소(墓所) 이력(履歷) 사행(事行) 등을 하나하나 자세히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오직 공의 묘소에 의심스러움이 있다하여 슬프게 생각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질 까닭이 있겠는가?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믿어서 조상님들의 산소에서 풀을 베고 나무하는 것을 막고 세사(歲祀, 묘사 또는 시제)를 받들어 대를 이어 이를 바꾸지 않는다면 거의 추원지성(追遠之誠, 조상이나 선현들을 정성으로 기리는 것)을 다 했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일찍이 자인(慈仁)과 청송(靑松, 청송군 일대)의 병부(兵符, 군대 동원 표지로 쓰던 나무패)를 차고 왕래하면서 이곳에 왔던 일이 적지 않았는데 공의 후손들이 매번 이것을 한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어찌 내가 감히 그것이 어떻다 하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으므로 우선 글을 돌에 새겨 후대의 훌륭한 사람들의 의견을 기다리겠다.

집안 후손 승지(承旨) 휘옥(彙鈺)이 삼가 기록한다.

 

참고 : 전의비문(傳疑碑文)은 선조의 행적이나 인품, 덕행을 후손에게 전하고 선조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기록하는 비문(碑文)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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