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강씨 박사공파 7세 휘 회백(淮伯) 사애각 비명 (思愛閣 : 효행, 유교적 모범 인물에 대한 후손들이 세운 각(閣) 비명(碑銘)
고려 말 이조(李朝)초에 통정(通亭) 강공이 있었는데 휘는 회백(淮伯)이요 통정은 그의 호이고 관향은 진주이다. 고려 공민왕 정유년(1357년)에 태어났다. 병진년(1376년,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양촌 권근선생을 따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와 세자사부 등을 지냈다.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등과 함께 의복제도(衣服制度)를 고친 것이 많았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처음에는 고려에서 벼슬하던 훌륭한 인재들을 발탁하였는데 공도 그중에 한 분이었다. 그때 경전(經典 : 法典)을 처음 만들어 전국 팔도에 시행하였는데 경륜과 학문이 깊은 분인 것을 알고 특별히 계림부윤(鷄林府尹, 경주지역 행정과 치안을 총괄하는 관직)에 임명하고서 다정하게 권면(勸勉)하는 말씀을 내리자 공께서도 부득이 계림부에 나아가서 정사를 살피었는데 문옹(文翁)의 인애정치(仁愛政治)에 더욱 앞장서고 중국 한나라 때의 훌륭했던 지방 수령들인 공수(龔遂)와 황패(黃霸)의 정치를 행하니 정사가 크게 현창하였다.
관공서의 건물을 지으면서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또 누각(樓閣) 두 채를 지어 병자(病子)들이 쉬는 장소로 삼았는데 누각의 이름을 의풍(倚風)과 광풍(光風)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에 의풍은 없어지고 광풍은 남아 있었다. 의풍루 아래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지가 몇십 년은 지났다고 옛 노인들이 전해오는 말씀들이 있었는데 만약 그 말씀들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번에 우리 후손들이 조그만 돌이라도 깍아 공의 훌륭한 공적을 옛터에 세워야 옳지 않겠는가? 중략~.
세계(世系)나 공적은 묘비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다른 것은 생략한다. 공의 후손들을 살펴보면 경사(慶事)들이 매우 많지만 서글픈 것은 공의 공적이 모두 없어질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인들 서로 간에 재물을 모아 이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니 그 뜻이 진실로 가상하다.
이에 명(銘)한다.
藍山蒼蒼 蚊水洋洋(오산창창 문수양양)
오산의 나무는 푸르고 문수의 물결 양양한데
賢人所過 流峙增光(현인소과 유치증광)
어진이 지나갔으니 이 고장이 더욱 빛나는구나
杜召龔黃 奚獨專美(두소공황 해독전미)
두소와 공황만이 어찌 홀로 아름답다 하는가
有樓蒜然 制勝之後(유루산연 제승지후)
높은 누각 우뚝한데 제승 뒤에 있었구나
峴碑雞沒 蜀謠猶傳(현비계몰 촉요유전)
산마루의 비석 없어졌지만 촉군(蜀郡) 노래 들리는 듯
我銘斯石 不塊後人(아명사석 불괴후인)
내 명을 이 돌에 새기니 후인들에 부끄럽지 않으리
【가선대부, 전행병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 춘추관사, 오위도총관, 계림부윤 이돈상(李敦相) 글을 짓다】
참고 : 이돈상(李敦相, 1815~미상) : 공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 등 역임
※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