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지리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40리를 뻗어와서 금계(錦溪)의 강변에 이르러 아름답게 불끈 솟은 봉우리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 봉이 옥녀봉(玉女峯)이라고 한다. 그 남쪽에 평평하게 펼쳐진 한 지구(地區)를 이루었는데 그 지역 중앙에는 큰 사찰이 있었는데 전해오기로는 이 사찰이 단속사라 하였다. 이 절은 이미 폐사되었고 그 자리에 민간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나무들을 베어 불사르고 개간하여 집도 짓고 논밭도 만들어 점점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그 가운데(옛날 단속사 앞)에 전란으로 황폐해진 들판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전하기로는 이 매화나무는 고려에서 정당문학을 지낸 강통정(휘 淮伯) 선생께서 등과(登科)하기 전에 이곳에서 독서하시다가 손수 심은 나무라고 전해졌다. 그래서 동리에 사는 노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옛날 훌륭한 어른이 심고 기른 나무라 하여 서로 조심하면서 베어내는 일 없이 아끼고 보호하여 옛날같이 보존하여 온 지가 거의 수백여 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곳은 깊은 산골짜기여서 나무하고 농사짓는 동리이지만 아름다운 향기는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다. 나(글쓴이) 하용제(河龍濟)의 숙조(叔祖, 작은댁 선대 할아버지)이신 경재(敬齋) 선생께서도 여사(餘沙)에 있는 세장(世庄, 고택)에다가 손수 감나무를 심으셨는데 지금에 와서도 매우 잘 자라서 그 때와 다름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남(山南, 경상도)에서는 양절(兩節, 두 가지 절승의 나무 즉 정당매와 감나무)이라고 칭하였다.
두 어른을 살펴보면 두 댁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고 같은 동리에서 살았으며 또 조정에서도 같이 벼슬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 분의 지위도 경상(卿相, 재상) 반열에 있어서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도 미쳤을 것이니 그 남겨주신 음덕이 미치는 바가 또한 같았을 것이다. 비록 수목이라 할지라도 아끼고 사랑하였는데 하물며 그 덕업이 가히 오래 전해지고 또 빛나지 않았겠는가?
헌종(憲宗)14년인 1847년 경에 강씨 일가 중에 모모(某某, 세주씨 등)이 조상님의 손때가 묻은 이 매화나무의 유래가 거의 없어질까 걱정하여 조심스럽게 단(壇)을 쌓고 봉축(封築)한 다음 돌에 유래를 새겨 표하였다. 이렇게 하니 옛날과 비교하여 더욱 자세하게 매화나무의 유래를 알게 해 놓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 문안공(文案公) 강문회(文會)씨가 매화나무가 서 있는 곳이 너무 허전하고 의지할 것이 없음을 걱정하여 75세의 쇠약한 몸으로 삼사백 리 먼 곳에서 달려와 종족들과 협의하여 매화나무 옆에 일각(一閣)을 지었는데 불과 수개월 만에 공사가 끝나자 인근에 널리 알려서 큰 잔치를 벌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때 낙성식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통정선생의 후손들은 그 어른이 전해주신 것을 더욱 영원히 보존해야 할 것이다. 산이 만약 더 높았으면 물도 더욱 맑았을 것이며 나무와 잡초들도 더욱 무성하고 기암과 괴석들이 빛나지 않는 것이 없어서 각(閣)에 단장을 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환하게 빛났을 것이며, 매화도 봄을 기다리지 않고도 영광스런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또 이어서 모두가 말하기를 “문안공(文案公)이 이룩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이 각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그분이 아니였다면 앞으로 몇 십 년을 기다렸어야 할 것이다.”라고 들 하였다.
이 사람(글쓴이)은 경건하게 이 글을 써서 통정선생이 매화나무를 심은 유래와 문안공이 이 비각을 건립한 사적을 밝혀 이해에 도움이 되게 하고져 한다.
【1915년(乙卯) 진주 후인(后人) 하용제(河龍濟) 글을 짓다】
참고 :하용제(河龍濟, 1854~1919) :자는 은거(殷巨)호는 약헌(約軒),유학자, 항일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