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의 관향은 진주이다. 고려에서 진산부원군에 봉해지신 계용(啓庸) 선조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대대로 내려오면서 벼슬이 끊어지지 않고 번성하여 나라에서 큰 씨족이 되었다. 여러 대를 내려와 통정선생에 이르러 묘소를 경기도 연천 서쪽 강내리 유좌에 모셨지만 지금까지 오백여 년이 지나오는 동안에 아직도 현각(顯刻)이 없는 것은 대개 의례(儀禮)를 다 갖추지 못한 것이다.
후손 대곤과 영훈(英勳)이 산소를 살펴보고 종중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대가명족(大家名族)인데 이름난 조상님들을 높이는 정기(旌紀, 공적에 대한 기념)가 소홀하고 의절(儀節, 예의)이 미비 되었다. 세월이 흘러 멀어지는데 무엇으로 자손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인가? 마땅히 비석을 세우자.”라고 말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에 용머리와 거북 바탕 돌로 비를 마련하여 큰 길가에 세우기로 하고 공(通亭公)의 손자 문량공 희맹(希孟)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내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그 행장을 살펴보고 또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서(序)와 명(銘)을 지으려 한다.
공의 휘는 회백이고 자는 백보(伯父)이며 호는 통정이다. 고려에서 판도총랑(版圖摠郞, 토지 지적 행정구역 등을 관리 총책)을 지내시고 중대광 문하시중에 증직되셨으며 진원부원군에 봉해지신 창귀의 증손이고, 삼중대광 문하좌시중을 지내신 문경공이신 군보의 손자이며, 문하찬성사를 지내신 공목공이신 시(蓍)의 큰아드님이 되신다.
공은 공민왕 정유년(丁酉年, 135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나게 똑똑했다. 서사(書史)를 읽고 조금 지나면 문득 외어버렸고 문장을 지으면 선천적인 취미와 고상한 사상으로 틀에 박힌 글을 쓰지 않아서 당시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폐왕(廢王) 우왕(禑王) 병진년(丙辰年, 1376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양촌 권근(權近)선생을 따라 성리학을 배웠는데 더욱 연구하고 정밀하게 생각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겨 성균관제주, 밀직제학, 밀직부사, 밀직첨서사사 등을 지냈고 추충협보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중국 명나라 홍무제가 황제로 등극한 후 홍무 무진년(洪武 戊辰年 1388년)에 나라의 왕을 폐(廢)하는 변이 일어나자 대명황제(大明皇帝)가 크게 진노하여 고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그때 공이 명나라에 가서 사실의 진상을 변론하고 또한 왕이 친히 조회(朝會)에 참석할 것을 청하자 명나라에서 회답하기를 친근(親覲, 가까이 뵙다)은 필요 없다고 하여 겨우 화를 당하지 않고 돌아왔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할 때 시부(詩賦, 시와 산문)를 잘 짓고 읊어서 명나라의 선비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공과 조준(趙浚) 등과 함께 왕자사(王子師)로 삼았는데 고사하였다. 얼마 후에 판밀직사사로 승진하고 겸하여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중략~. 공은 1403년 춘추 겨우 46세에 돌아가셨다. 그 후에 손자가 귀하게 되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이사(世子貳師, 왕세자에게 경전 사서 도의 등을 가르치는 관직)에 증직되었다.
아! 공의 지나온 일들이 행장(行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무슨 말을 더 붙이겠는가? 공의 전배(前配, 죽은 처)는 정씨로 3남2녀를 두었는데 종덕은 장령이고, 우덕은 창령현사(昌寧縣事)인데 아들이 귀하게 되자 좌상에 증직되었으며, 진덕(進德)은 우부승지(승정원 정3품 당상관)이다. 후배(後配, 후실) 이씨는 아들 2명을 두었는데 석덕은 지돈령을 지내고 좌상에 증직되었고, 순덕은 감찰이다. 손자들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다만 후손 중에 이름난 사람들을 열거하면 맹경(孟卿, 둘째 우덕의 아들)은 영의정을 지냈고, 희안(希顔, 넷째 석덕의 아들)은 부윤을 지내고 시서화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단종이 손위(遜位, 임금의 자리를 내어 놓음)하자 세상에서 숨어 살면서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희맹(希孟, 넷째 석덕의 아들)은 좌찬성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문량공이고, 귀손(龜孫, 희맹의 아들)은 우상(右相, 우의정 정1품)을 지내고 시호가 숙헌공(肅憲公)이다.
공의 후손들은 세상에 이름난 신하와 큰 벼슬을 한 후손들이 이어 나왔고, 충의(忠義) 효제(孝悌)한 후손들, 경술(經術, 경서에 관한 학문)이나 문장에 이름난 후손들이 나와서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알려지게 되었고, 후손들도 번성하여 온 나라에 가득하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후하게 베풀어준 보은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아름답고 성하도다.
이어서 명(銘)을 붙인다.
晉山門冑 世以顯聞(진산문주 세이현문)
진주강씨 후손들이 세상에서 이름나서
允矣姜公 雋哲冠群(윤의강공 준철관군)
훌륭하다 강공이여 무리 중에 뛰어났네
從師受訓 實以學問(종사수훈 실이학문)
스승에게 잘 배워서 학문으로 이름내니
大閘科第 奮庸熙運(대갑과제 분용희운)
대과에 급제하여 나라 위해 힘을 썼네
拔擧文學 主眷彌隆(발거문학 주권미륭)
문학으로 발탁되어 임금은총 받았었고
旋轉冢宰 出按嶺東(선전총재 출안영동)
총재가 되었다가 강원관찰 되었었네
推忠協輔 策勳褒崇(추충협보 책훈포숭)
추충협보 공신칭호 높은 포장 받았으나
國勢綴旒 憤涕心恫(국세철류 분체심통)
임금은 허수아비 마음 아파 눈물 나네
忠言邃識 炳蔚奏章(충언수식 병울주장)
높은 경륜 충언이요 아름다운 상소 올렸더니
王乃貶爵 流于南荒(왕내폄작 유우남황)
왕께선 벼슬 깍고 남쪽으로 내치시네
逮我聖祖 屢降綸音(체아성조 누강륜음)
조선이 건국되자 임금께서 찾으셔서
一麾分憂 成關鷄林(일휘분우 성관계림)
함께 걱정 나누자며 함관과 계림으로 가라하네
持服守廬 牢辭懇惻(지복수려 뇌사간측)
상복입고 여묘하니 완강히 사양했으나
上意不允 黾勉典職(상의불윤 민면전직)
왕명이 불허하니 부득이 출사했네
鉤姦蹓賊 舒仁肅刑(구간류적 서인숙형)
간사한 적 잡아내고 형정이 공평하니
琢珉以頌 到今亭亭(탁민이송 도금정정)
비석세워 칭송한 것 지금까지 아름답다
履道尚謙 小心守拙(이도상겸 소심수졸)
도덕과 겸손으로 본분을 지켰으니
後有君子 亮公志節(후유군자 양공지절)
뒷날에 군자들이 공의 지절 헤아렸네
大期俄至 箕取遞乘(대기아지 기취체승)
큰 기대 뒤로하고 하늘나라 가셨으니
豊受嗇享 理尤難徵(풍수색향 리우난징)
벼슬 높고 명은 짧았으니 하늘이치 모르겠네
蓄祉歸贏 昆裔熾昌(축지귀영 곤예치창)
복을 쌓아 남겼으니 자손들이 창성하고
江內之麓 有鬱其蒼(강내지록 유울기창)
강내의 산록에는 푸른나무 빽빽하네
我撮其要 大書深刻(아촬기요 대서심각)
대강을 기록하여 큰 글씨로 깊이 파서
於千萬年 永昭不泐(어천만년 영소부륵)
천만년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으리라
【안동(安東) 김윤동(金潤東)이 글을 짓다】
참고 : 홍무 무진년(戊辰年, 1338년) 나라의 왕을 폐위하는 변은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장군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한 사건이다. 그후 고려 33대 창왕이 즉위하였으나 우왕과 창왕이 왕씨의 자손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명분으로 다음 해(1389년)에 창왕을 폐위시키고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