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高麗) 명신(名臣) 열전(列傳) (통정공 강회백, 진주강씨 박사공파 7세)
강회백은 진주 사람이고 아버지 시(蓍)는 문하찬성사(문하부의 정2품 정승)를 지내셨다. 회백(淮伯)은 고려 신우(우왕)가 즉위했을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차례 벼슬자리를 옮겨 성균관제주, 밀직제학(정3품), 밀직부사(정3품) 밀직첨서사사를 지내고 추충협보공신 칭호를 받았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하자 회백, 조준(趙浚), 서균형, 이지 등을 세자사(世子師)로 삼았다. 회백이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게 없다 하여 고사(固辭)하자 판밀직사사 겸 이조판서에 승진시켰다.
공이 왕에게 상소하여 아뢰기를 “길흉(吉凶)이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요, 화복(禍福)은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니 어찌 불교를 빙자하여 술수(術數)를 믿으면서 복리(福利)만 바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입니까? 불교의 교리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을 제일가는 의(義)로 삼고 있는데 만약 백성들이 힘을 다하여 부처만 받들고 탑이나 쌓는 것은 도리어 부처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재앙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요사이에 연복사 짓는 데에 백성들의 재산이 결단이 나고 일자리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상하게 된 바가 큽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는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고, 또 한 번 잘 다스려지면 다시 한번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어찌 지기(地氣)가 쇠하고 흥함에 따라 나라의 성쇠가 좌우된다고 한단 말입니까? 고려가 창업한지 사백여 년이 지났는데 언제 삼경(三京, 서경 남경 동경)을 두고 순행(巡幸)하였으며 36국의 조공(朝貢)을 받은 바 있습니까? 신우(우왕)가 도참설(圖讖說)을 믿어 도성을 남경으로 옮겼으나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나라가 한강에 와서 조회에 참석한 바가 있습니까? 재앙과 이변이 일어남은 하늘로 말미암은 것이니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돌아보고 살펴서 하루하루를 조심하고 자신에게 재화를 쓰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를 항상 생각하여야 하고 또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걷되 적게 거두도록 한다면 하늘의 답이 내려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양으로 천도하고져 백성들을 터전에서 몰아내고 백성들의 힘을 궁궐 짓는데 받치게 하며 필요한 세금을 거두고 거기에다가 농사철을 잃어버리게 하여 나라의 근본이 동요되고 화합하는 분위기를 깨어버린단 말입니까? 더구나 잔치를 베풀고 사치를 일삼는 것은 어진 마음을 해치는 도끼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폐하께서 궁중에서 새로이 정자를 짓고 화초를 심어 연회장소로 삼고 있으니 신이 두려운 것은 사치하는 마음이 앞으로 더욱 성할까 걱정됩니다. 또 폐하께서 입으실 옷을 창고지기로 하여금 사서 바치게 하니 한 필의 명주값이 몇 갑절이나 바싸게 되니 모리배들이 가만히 앉아서 많은 이익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기는 창고에서 일하는 노예들로 하여금 비단 짜는 것을 익히게 하여 그것을 바치게 하여 내용(內用)으로 쓰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생각하였다.
얼마 후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 지방최고행정 및 감찰 최고책임자)로 지방에 나갔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풍속을 교정하고, 백관을 규찰, 탄핵하는 등 관리의 위법을 찾아내어 바로잡아 처벌하는 관청의 수장)에 임명되었다.
공이 동료들과 말하기를 “아래에서 사람의 일이 어그러지면 하늘의 변고가 서로 응하게 된다. 그런데 요사이 별을 살펴보면 운행질서를 잃어버렸고 달이 월식을 하는가 하면 농사철이 되어 파종할 시기인데도 추위와 얼음이 녹지 않았고, 기후가 한겨울 같으니 이는 반드시 재앙이 올 징조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임금께 아뢰어 이와 같은 조짐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마음을 닦고 반성하시어 정사와 형벌을 밝게 하시어 하늘의 경계에 부지런히 대처하시면 하늘이 답을 주실 것입니다. 하오니 서울을 비롯한 그 외 지방의 급하지 아니한 토목공사를 일체 정지하시어 백성들의 원성을 줄여주소서.”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기었다.
그때 간관(諫官, 중서문하성의 하부기관 낭사의 관원으로 국왕의 잘못을 간언하는 관직)인 김진양 등이 포은 정몽주의 지시를 받아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의 죄를 탄핵하니, 회백도 또한 대관(臺館, 어사대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상소를 올려 조준 등을 탄핵하였다.
이러는 사이 정몽주(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와 고여에 의해 암살)는 주살(誅殺) 되고 김진양 등은 모두 매를 맞고 유배되었는데 회백은 왕의 사위인 회계(淮季)의 형이라 하여 죄를 받지는 않았지만 결국 병이 있다고 하고 사직하였다. 그런데 그때 좌상시(낭사의 간관, 정3품)였던 김자수가 상소하기를 "강회백 등은 무고한 사람들을 얽어서 왕을 속이려 하였고, 전하께서도 한두 대신들을 국문하여 그 내용을 아시고 김진양 등 18명을 죄에 따라 귀양을 보냈는데 오직 강회백과 유기 등은 죄를 면하여 집에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논에 같이 참여한 사람들 중 죄는 같은데 벌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판단하여 회백의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어 나라의 법을 바르게 하소서.”라고 다시 상소하니 왕은 부득이 회백을 진양으로 유배를 보냈다.
조선이 건국되자 동북면도순문사(함경도 지역의 치안과 행정 총괄)에 임명되었다가 돌아가시니(1402년) 나이는 46세였다.
※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