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회백(淮伯)이고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이다. 고려시대 문하찬성사를 지내신 휘 시(蓍)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남보다 뛰어났었다. 학문을 익힐 때 서사(書史)를 읽고 조금 지나면 문득 기억하였고 문장을 지으면 고상한 품위가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관행으로 쓰는 문장과는 달라서 그때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신우(辛禑, 禑王) 초에 정총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고 양촌 권근(權近)선생을 따라 성리학(도덕과 인격과 학문 중시)을 익혔는데 더욱 연구하고 정밀한 부분까지 생각이 미치니 양촌선생이 크게 칭찬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성균관제주와 밀직제학, 밀직부사, 밀직첨서사사 등을 지냈고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공과 함께 조준 서균형 등을 세자사(世子師)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공은 배운 바가 적어 천박하다 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얼마 후 밀직사사로 승진하고 겸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때 연복사를 짓고 도참설(圖讖說, 풍수 천문 등 다양한 사상과 결합)에 따라 왕이 남경(南京, 서울)으로 도성을 옮기려 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를 올려 논박(論駁)하고 겸해서 시사(時事)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니 왕이 기꺼이 받아드렸다.
얼마 후 교주강릉도관찰출척사로서 지방에 나아갔으나 다시 정당문학 겸 대사헌으로 불러 조정에 들어오게 했다. 그때에 천재(天災)가 자주 나타나자 공이 임금께 청하기를 몸을 닦고 마음을 살펴서 하늘이 보이는 계시에 답을 드리라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또 정몽주 하륜(河崙) 등과 함께 호복(몽고 복장)을 바꾸어 중화의 복장으로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몽주의 옥사(獄事, 역적으로 다스림)가 일어나고 간관(諫官, 사헌부 사간원 관원) 김진양 등은 매를 맞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에 공은 병이 있다 청하고 사직하였다. 이에 우상시(右常侍) 김자수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강회백 등은 같은 죄를 지었으니 벌을 주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부득이 공의 관직을 삭탈하여 진양으로 유배를 보내었다.
공은 유배를 온 다음 두문불출하자 같은 동네에 사는 일가친척들도 공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 이어서 조선조(朝鮮朝)의 개국(開國)되는 혁명(革命)이 일어나자 막냇동생 회계는 영양왕의 사위라 하여 화를 입었으나 공은 근신하였을 뿐만아니라 명망이 있어서 죄를 면하여 주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고 고려의 인물들을 찾아 벼슬에 나오도록 하였는데 그때 공은 어머니 상중(喪中)에 있었지만 특별히 기용되어 계림부윤(경주 지역 행정 책임자)에 임명하였다가 갑자기 동북면도순문사(함경도 지역의 치안과 행정 총괄)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고사(固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춘추 46세였다.
공의 선배(先配) 정씨와의 사이에 아들 3형제와 딸 둘이 있었는데 큰아들 종덕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정4품)이고, 둘째 우덕은 창녕현사(창녕현 관청)이고 셋째 진덕(승지공)은 세자필선(世子弼善, 정4품, 세자의 교육 담당)이다. 계실(繼室, 재취) 이씨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석덕은 즉 우리 대민공(戴敏公)이고 둘째 순덕은 사헌부감찰이다.
이 사람 희맹(希孟, 석덕의 아들)이 세 살 때에 할머니에게서 자랐는데 나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시기를 “내가 너의 조부가 귀양살이할 때와 두 번의 천은(天恩)을 입었을 때마다 너의 조부님은 윤락(淪落, 권세나 살림이 몰락)하였다고 낙담하는 일이 없었고, 신달(伸達, 기운이 펴다)하였다고 자만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래서 비록 처자(妻子)라 할지라도 공의 기뻐하고 근심하는 빛을 본 일이 없었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외종질 하연(河演)의 사람됨을 기특히 여겨서 공의 막내 여동생을 시집보냈다. 그때 하공(河公)이 진곡(晉曲)에 집을 마련하자 충고하여 말하기를 “자네는 마땅히 좋은 벼슬자리에 나아가 나라의 큰 재상이 될 것이며 시골에서 늙어갈 사람이 아니다.”며 서울로 가기를 권하였다. 뒤에 보니 그때 한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이 사람 희맹(希孟)이 그 말을 듣고 지금 생각하니 공의 덕있는 행실이 높아서 따를 수 없을 것 같다. 저 궁(窮)하던 영달(榮達)하던 간에 지조를 변하지 않는 확실한 마음이 있었을 뿐이다. 공은 어떤 사람이 누추한 곳에 있어도 그 사람을 알아보았으니 명찰(明察)함이 있다고 할 수 있고, 곤궁한 집에 있어도 언행을 가려 쓰지 않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공경함이었다. 이미 공경하시고 명찰해서 그 지조를 확실히 지키셨으니 이와 같은 공을 보면 이른바 천년을 보전하시고 영원히 명예를 지키셨다고 할 만하다.
【손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종1품) 희맹(希孟)이 삼가 행장을 짓다】
참고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 조선시대 왕의 외척이나 종친을 관리하기 위한 관청의 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