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문하찬성사(高麗門下贊成事) 진산군(晉山君) 시 공목(蓍 恭穆, 진주강씨 박사공파 6세) 강공(姜公) 유적비명(遺蹟碑銘)
안동은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큰 고을이다. 고려 신종(神宗) 때에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하였고 이 고을의 장(長)을 지낸 분들은 거의 다 명공거경(名公巨卿 : 이름 높은 벼슬아치)들이었으니 공목공 강공(姜公) 휘 시(蓍)도 그중의 한 분이었다. 공은 진양의 명망 높은 집안의 출신으로서 선대에 유학(儒學)으로 현달(顯達, 명성)한 분들이 많았다. 감찰어사 휘 사첨(師瞻)과 판도정랑(版圖正郎, 호구 세금 등 재정 관리직) 휘 창귀(昌貴), 봉산군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경(文敬)이신 휘 군보(君寶) 등 세 선조님들도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셨는데 증조, 할아버지, 아버님이 되신다.
공은 고려 충숙왕 기묘년(己卯年, 1339년)에 태어나서 음직(蔭職, 조상의 공으로 얻는 벼슬)으로 연릉직(延陵直, 궁궐의 별관 관리)에 보직된바 그의 나이 겨우 여덟 살 때였다. 19세 되던 정유년(공민왕6년, 1357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1362년)에 대관서(代官署, 식품 공급 관리)의 승(丞, 실무담당)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낭장(郎將, 중앙 군조직, 정6품)겸 감찰사 규정(糾正, 종6품)으로 옮겼다.
그 후에도 전공사(典工司)의 좌랑(佐郞, 정6품)과 광흥창(廣興倉, 관리의 녹봉 담당)의 사(使, 정4품))로 역임하면서 번거로운 일을 깨끗하게 처리하니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고 창찬이 많았다. 합문(閤門 : 통례문(通禮門) 인진부사(引進副使, 국가의 조회와 의례 전담)로 있으면서는 예의와 용모를 법도(法度)에 맞게 처신하니 조열대부(朝列大夫에 가자(加資 :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가 되었고, 지합주(知陜州, 합천지역 수령)로 나아가서는 정사의 실적이 우수하였다. 얼마 후 전법(典法), 판도(版圖), 전리(典理)의 총랑(摠郞)을 두루 역임하고 중현대부(中顯大夫) 위위시윤(衛尉寺尹, 의장과 군기 관장)이 되었다가 다시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좌윤(三司左尹, 회계와 곡식 담당 고위직), 봉순대부(奉順大夫) 판군기시(判軍器寺, 현재의 방위사업청)로 옮겼다가 무오년(戊午年, 1378년)에는 강릉도의 안렴사(按廉使, 지방 행정 군사 등 관리 고위직)로 나아갔다가 기미년(己未年, 1379년)에는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시(判繕工寺, 건축 토목 관장 최고위직 정3품)로 조정에 들어왔는데 갑작기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승진하여 경신년(庚申年, 1380년)에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외직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님이신 문경공이 돌아가시었다. 상기(喪期)가 끝나고 바로 도첨의부(都僉議府, 중앙행정기구) 좌상시(左常侍)에 임명되었다가 임술년(壬戌年, 1382년)에 판도판서(版圖判書, 재정 호구 토지 관장 최고위직)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다시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 정3품)로 옮겼는데 얼마 후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칭호도 받았다.
그해 겨울에 다시 광정대부(匡靖大夫)로 품계가 올라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왕의 부모에게 제사 등) 겸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의약 관련 고위직)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계해년(癸亥年, 1383년)에는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 문하부의 고위직)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에 올랐다. 경오년(庚午年, 1390년) 여름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판자혜부사(判慈惠府使, 왕의 어머니 관련 업무) 상호군(上護軍)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가 되고 겨울에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 가수(加授)가 되고 대광상의(大匡商議)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건축 토목 관장 최고위직) 좌우위상호군(左右上護軍, 2군6위 중 좌우위(수도 방위)의 최고 지휘관)에까지 올랐다.
그때 공의 대부인(어머니) 김씨가 건강이 매우 좋으셨고 또 공의 형제(휘 서筮)와 아들 회백(淮伯)이 이어서 상부(재상)에 들어가니 세상 사람들이 영화로운 집안이라고 하였다.
임신년(1392년, 조선 개국)에 모친상을 당하여 삼 년간 여묘(廬墓)를 살았는데 그해에 고려가 망하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조선 정종(定宗, 이방원) 경신년(1400년) 11월에 돌아가시니 춘추(春秋)가 62세였다. 부음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나라에서 유사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돕게 하고 공목(恭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 이듬해 3월 갑인일(甲寅日)에 장단(長湍, 개성시와 판문점 일대)의 나부리(羅浮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배(配, 아내)는 정신택주(貞愼宅主) 진주하씨(晉州河氏)인데 진천군 즙(楫)의 따님이시다. 공은 천성이 부지런하였고 풍채는 엄중하게 생겼다. 정성을 다하여 몸가짐을 조심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아부하는 일이 없으니 그 명망(名望)이 높았다.
지난 병진년(1976년)에 안동지방에 사는 후손들이 영호루(映湖樓)에 모였었는데 그 자리에서 모두 말하기를 “이 고을은 우리 선조님께서 일찍이 다스렸던 곳으로 바위는 물론 나무나 풀까지도 더욱 향기로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다 없어지지 않았으니 비석을 세워 옛 자취를 표하도록 합시다.”하였다.
그 후로 영호루 남쪽 수상동(水上洞)에 터를 마련하고 6~7년이 지나 드디어 일을 마쳤는데 대묵(大黙)의 노고가 가장 많았으며 창우(昌佑)는 비석의 건립을 담당하였다. 창우와 신혁(信赫)이 함께 이 못난 사람 이가원(李家原)을 찾아와 명(銘)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가원이 양촌 권근(權近) 선생이 지은 묘지(墓誌)와 함께 윤채(胤采)가 지은 행장(行狀) 등을 근거로 하여 글을 짓는다.
생각해 보니 공이 이 안동에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 부임해 오신 것은 고려 우왕(禑王 6년 경신년, 1380년)이었는데 당시는 고려의 운(運)이 다할 때여서 원(元)나라는 고려의 서쪽을 엿보고 왜구(倭寇)들은 나라의 남쪽을 미친개처럼 넘보고 있었다. 그 때에 공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려고 애쓰시던 모습을 600여 년이 지난 지금 상상해 봅니다.
명(銘)한다.
維茲福州國之雄府(유자복주국지웅부)
이곳 복주(안동)는 나라의 큰 도시여서
凡莅茲者材兼文武(범리자자재겸문무)
이 고을을 다스린 이는 문무가 모두 훌륭했네
不才莫任匪德曷撫(부재막임비덕갈무)
재주 없는데 어찌 맡으며 덕이 없는데 어찌 다스릴까
吏民孱雋風俗良梏(이민잔준풍속랑곡)
아전과 백성들은 잔약하고 풍속은 거칠었었네
實繫于是譚何容易(실계우시담하용이)
이와 같았으니 다스림이 어찌 용이했겠는가
憲憲恭穆清明為吏(헌헌공목청명위리)
헌헌하신 공목공이 깨끗한 정사로 백성을 위안했네
時維王麗悲運是值(시유왕려비운시치)
때는 고려말이라 비운의 때를 만났으니
為之尤難不堪愁領(위지우난불감수령)
다스리기 더욱 어렵고 근심을 견디지 못할 때
王曰汝著往战其治(왕왈여저왕전기치)
왕께서 말하기를 시(著)야 어서 가서 그 고을을 다스려라
公拜稽首載疾南馳(공배계수재질남치)
머리숙여 명을 받아 남쪽으로 달려와서
守法公平府民溫慈(수법공평부민온자)
공평하게 법을 지키고 백성들을 따뜻하게 사랑하고
秉直不阿乃公之持(병직불아내공지지)
꼿꼿한 자세로 아부하지 않았으니 공의 평소 지조였네
清洛之滸名樓之南(청낙지호명루지남)
깨끗한 낙동강변 이름난 영호루 남쪽에
爰有一洞遺蹟是探(원유일동유적시탐)
여기 한 동네 유적을 찾아보니
是公所憩草樹如藍(是公所憩草樹如藍)
이곳은 공이 쉬시던 곳 초목도 옛 같이 푸르른데
曠六百祀馥播恩涵(광육백사복파은함)
육백 년 긴 세월 지났지만 향기로운 그 은혜 칭송되네
乃琢穹碑蜿蜒其螭(내탁궁비완연기리)
여기 높은 비석에 거북좌대 받쳤으니
雲霞增色人神胥夷(운하증색인신서이)
경치도 아름답고 신과 사람이 같이 하례하니
矧爾慈孫感慨曷涯(신이자손감개갈애)
하물며 그 자손들 감개가 어찌 다 말할까
我銘菲惻過者讀之(아명비측과자독지)
나의 명이 잘 짓지는 못했으나 지나는 이들 읽어보구려
【문학박사 (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이 공경하여 짓다】
※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