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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군(鳳山郡) 강공(姜公, 君寶) 신도비명(神道碑銘) : 진주강씨 박사공파 5세

   고려에서 삼중대광 문하좌시중을 지내시고 봉산군에 봉해지셨으며 시호가 문경이신 강공의 묘소에 묘갈명(墓碣銘)은 있으나 아직도 신도비(神道碑)가 없었다. 후손들이 마음을 모아 큰 돌을 다듬어서 고개 밑 큰 길가에 세우고져 대곤(大崑), 주진(周鎭), 봉수(奉秀), 신혁(信赫) 등이 이 사람에게 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자신을 돌아볼 때 학문이 보잘 것 없으니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여 사양하였으나 계속 간청하므로 기술하고자 한다. 중략

   공의 생년월일은 알 수 없고 다만 홍무 경신년(경신년, 1380)에 돌아가시자 성주(星州)의 가린현 어곡(嘉利顯 御谷, 현재 :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378번지) 병좌(丙坐)에 장례를 모셨었다. 중간에 묘를 실전하였다가 영조 신묘년(辛卯年, 1771)에 다시 찾아서 봉분을 예전과 같이 복구하였다.

   공의 배위는 계림군부인(鷄林郡夫人) 경주김씨인데 전객령(典客令) 여진의 따님이다. 임신년(壬申年)에 돌아가시자 임강현 대곡촌(臨江縣 代谷村)에 공의 묘소와 따로 장사지냈다. 아들 둘을 두었다. 큰아들 시()는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시호는 공목(恭穆)이고 둘째 아들은 서()는 좌정승을 지냈고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중략~

   5세 이하 자손들이 번창하여 높은 벼슬에 나아간 자손들이 많아 명예가 전국을 진동하니 그 근원(根源)이 깊고 뿌리가 단단히 자리 잡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세월이 이미 많이 지났고 문헌도 거의 없어져서 평일에 행하신 일이나 태어나신 년월일이나 표덕(表德, 덕행·선행을 나타내는 일), 배위의 묘소 등이 모두 전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진실로 한스런 일이다. 그러나 목은(牧隱) 이색(李穡)陽村(양촌) 權近(권근) 두 선생이 칭찬한 글을 지었으니 능히 후세에 증거할 만하며 다시 졸렬한 문장으로 찬양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이어서 명()을 붙인다.

 

維晉陽氏世著令德(유진양씨세저령덕)

진양강씨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덕으로 이름났는데

公又挺生負荷不忒(공우정생부하불특)

공같은 분이 또 나와 더욱 큰 공적 이루었네

早世蜚英通朝咸則(조세비영통조함칙)

일찍부터 이름 날려 온 조정이 따랐으니

為國蓋臣乃職其職(위국개신내직기직)

나라의 충신되고 맡은 직책 훌륭하게 수행했네

學篤行邃望重山斗(학독행수망중산두)

학문 높고 행실 신중해서 태산같은 명망도 있었고

名碩哀詩誄芳徽悠久(명석애시뢰방휘유구)

이름높은 석학들도 애도했으니 꽃다운 이름 영원하리

鮮原卜吉永妥真宅(선원복길영타진)

좋은 길지 마련했으니 이곳에서 영원히 쉬소서

我筆無華深鑱樂石(아필무화심참)

나의 글은 화려하지 않으나 훌륭한 돌에 깊이 새겨

瞻彼鳳儀螭首亭亭(첨피봉의리수정정)

봉의산을 바라보니 웅장한 비석 돌이 높이 서있어

風雨不泐垂千萬齡(풍우불륵수천만령)

비바람에 깎이지 말고 천년만년 전해지리

 

갑인년(甲寅年) 초여름에 안동(安東) 김윤동 찬(金潤東 撰) 글을 짓다

 

참고1 : 신도비명(神道碑銘)해당 조상님의 세계(世系), 성명, 본관, 관직, 업적, 가문 내 위상 등을 기록하여 묘소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석에 새기는 비문

참고2

전객령(典客令) : 궁정 및 왕실 관련 업무, 외교와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고위직

삼중대광(三重大匡) ; 대광(대장군 大將軍)에 오른 최고위 군사, 공신에게 주는 칭호(작위)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 왕을 보좌하고 국정운영의 실무를 총괄하는 도첨의부 소속 최고의 정무직 재상(1품 또는 종1)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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