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강씨 갑산선영(甲山先塋) 사적비문(事蹟碑文)
갑산(甲山)은 오(吾, 우리) 강씨 선조(上祖)의 체백(體魄, 몸과 넋)을 유장(攸藏, 간직하다)한 대명지(大名地, 길지)이다. 이 명지의 여음유택(餘蔭遺澤, 조상의 음덕이 미치는 곳)으로 운잉(雲仍, 자손)이 번연(蕃衍, 번창)하여 전후상승루백여재(前後相承累白餘載, 전통이 서로 계승되어 온 백여 년)에 관면의시(冠冕懿謚, 면류관이 아름답다)와 홍유석덕(鴻儒碩德, 큰선비와 큰 덕행)이 계세지미(繼世趾美, 대를 이어 세상을 아름답게)하여 동방(東邦)의 명족(名族)이 되었다.
세시향화(歲時香火, 때때로 향을 피우다)를 극진 봉향(奉享, 받들다)하면서 1792년(壬子)과 1807년(丁卯) 및 1860년(庚申) 그리고 갑산(甲山) 대동보(大同譜)를 편수(編修)하여 절기여과(節其餘果, 남은 결과를 아끼고 절제함 즉 남은 재정)로 개수(改修)한 1936년(丙子)에 이르기까지 누차에 걸쳐 개사수축(改莎修築, 고치고 닦고 짓다)이 있었고 근세(近世)에 이르러 풍마우세(風磨雨洗,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기다)의 피해로 괴손(壞損, 망가지다)이 우심(尤甚, 더욱 심하다)하여 1991년(申未) 봄에 대종회를 개최하여 영역정화(塋域淨化, 무덤 주변을 깨끗이 변화)와 재사이건(齋舍移建, 재실을 옮겨 짓다)을 상의하였다.
유지종현(有志宗賢, 뜻이 있는 일가) 다수왈방대거역(多數曰尨大鉅役, 많은 수가 크게 참여하다)을 단기 완성하려면 막대한 재정(財政)이 소요되므로 차제(此際)에 대동보 편찬(編纂)하여 그 여비(餘資, 남는 돈)로 경시(經始, 시작)할 것을 발의한바 첨종(僉宗, 종묘 모두 다)이 만장일치로 갈채찬동(喝采贊同, 박수로 찬성)이라 이에 수보임원(修譜任員)을 선출하고 보청(譜廳, 본부)을 서울에 설치하여 통문(通文, 연락 문서)을 전국에 일시 발송하였더니 원근제족(遠近諸族, 모든 일가)이 대거향응(大擧響應, 크게 호응)하여 3년여인 1994년 갑술년 겨울에 오종유사이래(吾宗有史以來, 우리의 종묘가 생긴 이후)로 미증유(未曾有,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의 대성적(大成績)이 찬연히 빛나고 자원(資源) 역시 완비되었다.
이리하여 1세 조(祖) 박사공(博士公) 휘(諱) 계용(啓庸))과 아들 내급사공(內給事公), 휘 인문(引文)의 실묘(失墓, 잃은 묘)가 실(實)로 천추(千秋)의 유한(遺恨, 남은 한)이더니 동원수국(同原首局, 같은 도량)에 상하(上下)로 양위(兩位)를 초혼예장(招魂禮葬, 혼을 청해 장례)하고 진혼(鎭魂, 넋을 달래다)하니 후손들의 흉금(胸襟,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활연(豁然, 환하고 시원함)하였다.
손자 어사공(御史公) 휘 사첨(師瞻)의 단소(壇所, 재단이 있는 곳)는 배위(配位, 죽은 아내의 존칭) 금성군(錦城君) 부인 나주 정(鄭)씨와 합단성위(合壇成位, 자리를 합한 단)하고 초혼예장(招魂禮葬)하고 진혼(鎭魂)하니 후손들의 흉금이 활연(豁然, 뚫리다)하였다.
장증손 대장군(大將軍公) 휘 창부(昌富)는 단비고처(壇碑故處, 옛 단에 남아 있는 비석)에 성분(成墳, 봉분)하고 차증손 진원부원군 휘 창귀(昌貴)와 배위 영가군(永嘉君) 부인 안동 권(權)씨의 외내(外內) 쌍영(雙瑩, 밝고 맑은 두 묘소)을 의구개수(依舊改修, 옛날 그대로 고치고)한 후에 석의(石儀), 비석)를 구설(具設, 온전히 만듦)할제 비석(碑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으로부터 문관석(文官石) 장군석(將軍石) 양석(羊石) 등석(燈石)에 이르기까지 정연수립(整然竪立, 가지런히 세움)하고 영역좌우허소(塋域左右虛疎, 묘역 좌우에 빈 곳)한 곳을 완고(完固)한 석축(石築)으로 풍수(風水)의 해를 예방하고 입출구 계단을 신축하여 승강(乘降)에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으며 산로(山路)를 확장하여 왕래에 편의를 제공하고 한문진홀사비석(悍門搢笏砂碑石, 기운이 서린 명당의 비석)이 갑산촌외(甲山村外) 강안(江岸) 수립전래(竪立傳來, 꼿꼿하게 세워 내려오다)한 것을 촌전적지(村前適地, 마을 앞 환경 좋은 곳)에 이건(移建)하여 참배 후손 등에 지소제계(知所齊戒, 장소를 경계하여 알리다)하게 하였다.
그리고 묘하(墓下) 백여 보(步)에 길지(吉地)를 점택(占擇, 골라 선택)하고 재사(齋祠, 재실)를 영축(營築, 짓다.)하고져 계획할 제 규모를 주밀(綢密, 그윽하게 얽다)하고 제도(制度, 도면)를 장엄(莊嚴)하게 정침사간(正寢四間, 제사 지내는 몸체의 방 4간)과 문루3각(問樓三閣, 문간방)을 건립하고 하우(下隅, 아래 모퉁이)에 다목적 양옥을 증축하여 제수봉공(祭需奉供, 제수를 만드는데 편리하다)과 제벽침숙(齊湢寢宿, 제사 시 씻고 잠잘 공간)이며 회의행사(會議行事)와 관리 수호에 만전을 도모하고져 한다. 이리하여 재실(齋室)로부터 영역(領域)을 앙망(仰望, 위를 쳐다 봄)하면 과연보검(果然寶劍, 귀힌 보물과 칼)의 탈갑(脫匣, 상자)이 횡공(橫空, 속이 비다)할 것 같고 영역(靈域, 묘지)에서 재사(齋舍, 재실)를 부시(俯視, 높은 곳에서 내려다 봄)하면 연화(蓮花, 연꽃)의 연리(蓮理, 두 연이 한 몸 같이)가 부수(浮수, 물에 뜨다) 같아서 화려하고 통창(通暢(마음이 통하다)함이 대성명문(大姓名門)의 의물(儀物, 풍속)이라 하게 될 것이다.
서기 1994년(갑술년) 10월 묘사 전일을 택하여 고유제(告由祭, 이유있는 제사)를 엄숙 봉행(奉行)하고 삼가 가전유사(家傳遺事, 가정에 전해 내려오는 일)를 상고(詳考, 자세히 생각)컨대 박사공은 고려 문과 국자박사로 1274년 고려 원종 갑술년에 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봉명(奉命, 명을 받들다) 일본에 다녀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하였고, 내급사공(內給事公)은 문과 전중 내급사(文科 殿中 內給事)로 배부공종행(陪父公從行, 아버지를 따라) 하였으며 학문의 추중(推重,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기다)함과 전력(前歷, 서장관 동행)의 경험이 있다하여 1281년 고려 충렬왕 신사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우사(又使, 또 시키다) 일본에 갔을 시(時)에 원이 일본을 정벌할 때라 해전이 격렬하고 풍랑마져 험란하여 생존자 무기(無機, 생명의 기운이 없음)라, 공은 구사일생으로 환국(還國)하여 세사분분(世事紛紛, 세상사 어지러움)함을 보고 둔적봉관(遯跡掛冠, 관복을 벗고 물러나다)하고 자손으로 하여금 불복출사(不復出仕, 벼슬 임명을 거부)하게 하였다.
어사공(휘 사첨)은 충렬왕조에 전중 감찰어사(殿中監察御史)요 손자의 귀(貴, 귀하게 된 덕분)로 판내의령참리부사(判內議令參理副使, 국가정책 조정 등 명예직)에 증직(贈職)하였으며 대장군공은 정용위대장군(精勇衛大將軍, 6위 중 하나로 고위장군)의 음직(蔭職, 아버지의 공으로 얻은 벼슬)으로 진양군(晉陽君)을 봉(封)하였고 진원부원군공은 음직으로 판도정랑(版圖正郎, 호구 토지 세금 등 관련 업무 담당)이며 1346년 충목왕 병술년에 계림(경주) 영천판관(永川判官, 행정 군정 실무 지휘 지방관)을 역임하고 중대광문하시중 진원부원군을 봉하였다.
열선조(列先祖, 여러 선조)의 이 같은 진충지효(盡忠至孝, 충성과 효를 다하다)와 위업홍덕(偉業鴻德, 위대한 업적과 덕이 번성))이 천고(千古, 옛적)에 탁월하고 팔역(八域, 여러 곳)에 양일(洋溢, 가득차 넘치다)하므로 사후(死後)에 천하의 길지(吉地)를 만나심이니 천지의 신명 덕의(德意)를 통찰하사 청운덕성(靑雲德星, 높은 벼슬)으로 위에서 조림(照臨, 해와 달이 비침)하고 상토서사(祥土瑞莎, 복되고 길한 땅)로 아래서 엄호하여 부골(腐骨, 썩은 뼈)이 안이불소(安而不消,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하고 정영(精靈, 영혼 넋)이 악이불산(樂而不散, 즐거워하되 그 기운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하시어 영세사전(永世祀典, 오랜 세월 이어갈 제례)을 흠향(歆享, 제사를 기쁘게 받다)하시고 무궁만세(無窮萬世, 오랜 세월까지 끝이 없다)에 음덕(蔭德)을 수여(垂與, 베풀어 주다)하시리니 이제 묘의(墓儀, 무덤 예의)를 엄수하시고 재사(齋舍)를 신축함이 관청(觀聽, 보고 듣는)의 미예(美譽, 아름다움을 기리다)를 취(取)함이 아니요. 실(實)은 봉선향사(奉先享祀, 먼저 받들고 제사를 드리다)를 예(禮)와 성(誠)으로 받드는데 본의(本意)가 있는 것이다.
선조를 추모함이 그 예(禮)가 아니면 이륜(彛倫, 인륜)과 사물(事物, 만물)을 다 할수 없고 성(誠, 참됨)이 아니라면 사려(思慮, 깊은 생각)와 신명(神明, 하늘과 땅의 신령)을 감응(感應, 느낌을 받아 마음이 움직임)케 못할 것이니 예와 성이 사사(祀事, 제사)의 근본이요, 인도(人道)의 추기(樞機, 근본)가 되는 것이니 후손된 자 마땅히 인차가의(因此加意, 이로 인하여 더 마음을 두다)하여 인인상계(人人相戒, 사람 상호 조심)하고 세세상과(世世相課, 세상의 이치에 영향을 받다)하여 추원보본(追遠報本, 조상 추모에 정성으로 은혜를 갚다)의 도리를 다하면 보극석복(保極錫福, 복을 받고 지키다)의 진리가 어찌 멀다 하리오. 근이차어(謹以此語, 조심스럽게 이 말을 드리다)로 이면종족(以勉宗族, 친족끼리 화합하다)하고 우사후생(又使後生, 후손들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다)하면 성례(誠禮, 정성을 다한 예)를 다하게 하노라.
【1994년 갑술년 10월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종회중】
※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