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강씨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550~???)장군 사적비명(事績碑銘)
진주는 삼한이래(三韓以來)의 옛 고을이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영남의 명승지로 이 고을의 진산인 비봉산 기슭에 만인이 우러러보는 곳에 높이 지은 이 사당은 고구려시대에 수나라를 무찔렀던 민족의 영웅 강이식장군을 모신 봉산사(鳳山祠)다.
대대로 전한 옛터에 사당을 처음 세운 것은 선조 3년 서기 1570년이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무너졌던 계사년 서기 1593년 불타버렸다가 백여 년이 지난 숙종 40년 서기 1714년 중건했으나 순조(純祖) 때 또 불타버리고 뒤에 다시 개축이건(改築移建)을 거듭한 나머지 이같이 장려(壯麗)한 새집을 이루어 놓았다.
사당에 올라가 옷깃을 여미고 참배한 다음 옛 역사를 멀리 상고하건대 우리 민족은 일찍이 백두산 흑룡강 일만리 평야 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민족으로서의 집단생명(集團生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대륙의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피로써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한나라 황제 한무제(漢武帝)가 수륙(水陸)으로 군사를 이끌고 와 침공했을 때 희생자가 얼마였던지, 영토의 일부일 망정 저들에게 빼앗겨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를 보았던 것이나 400년 동안 끈질긴 항쟁 끝에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수복하고 말았다..
대륙의 세력이 바뀔 때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기에 일찍 공손씨(公孫氏, 중국 요동지역 호족) 또 혹은 위구(褘寇, 도적나라)와도 싸우면서 장렬한 유혈(流血)을 아끼지 아니했으며, 마침내 수당(隋唐, 수나라와 당나라) 양조(兩朝) 5제(帝) 70년 동안 수많은 침략을 겪으면서 매양 그들을 물리친 민족의 의기(義氣)는 우리들의 혈관 속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을 무대로 하고 일어선 뒤 만주(滿洲)와 연해(沿海)와 서쪽으로 요하강(遼河) 유역까지 세력을 펴갔던 일대 강국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대륙에서는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일어나 남북조를 통일시킨 다음 그의 세력을 멀리 몽고(蒙古)와 서역(西域)까지 뻗어 나갔던 막강한 제국이었으므로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민족항쟁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서기 590년에 수문제가 남조(南朝) 진나라를 평정하자 일찍부터 진과는 친선관계를 맺어왔던 고구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영양왕이 즉위하여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을 미리 내다본 나머지 성곽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군량을 비축하기에 모든 힘을 다하던 중 수문제로부터 고구려를 협박하는 내용의 무례한 국서(國書) 보내왔던 것이니 그 국서의 내용은 진작 삼국사기 본기(本紀)에 실려있다. 영양왕은 모욕적인 국서를 받고 군신들을 불러 회답할 말을 의논했을 때 강이식장군이 글로써 대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하자고 주장하여 영양왕도 거기에 찬동하였다.
영양왕 9년 서기 598년 강장군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渝關)으로 향하게 하고, 말갈병(靺鞨兵 ,말갈족) 1만명으로 지금의 만리장성 서쪽 요서(遼西)로 나가 수(隋)나라 요서총관의 군사와 접전하며 임유관으로 수병(隋兵)을 유인했다. 수문제(隋文帝)는 수륙군(水陸軍) 30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요동(遼東)으로 향했으나 수(隋)의 육군은 요서의 유성(柳城)까지 나왔다가 장마를 만나고 군량도 떨어졌으며, 수군은 산동성에서 출병하여 바다를 건너 평양을 향하다가 해상에 폭풍을 만나 요수(遼水, 먼바다)를 건널 수도 없었거니와 실상은 강장군이 벽루(壁壘, 군사적 방어 시설)을 지켜 항전하고 수군(水軍)을 풀어 거의 전군을 격침시켜 수병(隋兵)은 30만 명 중 80~90%를 잃어버리고 9월에 돌아가니 이것이 수와의 1차 전쟁이었던 임윤관전투((臨渝關戰鬪)요 강장군의 큰 공적이었다.
그러나 전쟁 기록은 사서(史書)에 있으면서도 강장군의 성명은 적히지 않아 우리 모든 국민들은 일천 년이 지나도록 그의 사적(史蹟)을 아는 이가 없더니 국사학계의 태두(泰斗)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처음으로 밝혀냄으로써 민족적 영웅의 이름과 업적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흔쾌(欣快)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재는 그의 저서 속에서 서곽잡록(西郭雜錄, 조선 후기 이문흥이 선조 때의 사건을 포함해 인물 중심으로 저술한 야사집)과 대동운해(大東韻解, 조선 선조 때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사전) 등 두 가지 문헌을 인용했는데 강장군을 잡록(雜錄)에는 임유관전투 때 병마원수로, 운해(韻解)에서는 살수대전(薩水大戰) 때 병마도원수로 각각 달리 적혀 있는 중에서 단재는 서곽잡록의 기사(記事)를 쫓는다고 말하면서 임유관전투로부터 13년 뒤 수양제(隋煬帝) 때 일어난 제2차 살수대전 때에는 왕제(王弟) 건무(建武)가 해군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군을 맡아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물론 그같이 희귀한 문헌을 발굴해낸 단재의 견해를 따라야 하겠지만은 다시 생각해 보면 제1차 임유관전투 때 병마원수로 지휘했던 강장군이라 제2차 살수대전 때에는 병마도원수로 지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구태여 장군의 지위(地位)를 따져야 할 필요를 느끼기보다 그날에 그 같은 민족적 대영웅이 계셨던 것을 확인한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수문제 뒤 수양제(隋煬帝)와 양광(煬廣)이 영양왕 23년 서기 612년에 200만 명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쳤다가 참패한 제2차 살수대전 역사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고 사기에 자세히 적힌 바라 재록(再錄)하지 않거니와, 강씨(姜氏) 세보(世譜)에 의하면 본시 장군의 묘소가 고구려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다고 했고 지금도 만주 봉길선 원수림 역전(驛前, 중국 요녕성 무순시 고려촌)에 “병마원수(兵馬元帥) 강공지총(姜公之塚)”이라는 큰 비(碑)가 있어 수십 년 전까지도 여러 후손들이 참배한 사실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세상의 역사란 오래 지나면 희미해지기도 쉽고 잃어버리기도 쉬운 것이다. 장군으로서 강씨 시조를 삼아 왔으면서도 자세한 사적이 전하지 못하고, 뒷날 신라말엽(新羅末葉)에 태중대부(太中大夫) 판내의령(判內議囹)을 지낸 휘 진(縉)은 시호(諡號)가 정순공(正順公)이요 진양후(晉陽候)를 봉(封)한 어른이다. 그로부터 진주(晉州)로서 강씨(姜氏)의 본관(本貫)을 삼게 되었다.
강이식장군으로부터 1300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여러 지파(支派)로 나뉘었으니 각파 역대(歷代)를 통하여 문무장상(文武將相, 장수와 재상)으로 무수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므로 여기에 세운 봉덕사(鳳德祠)는 다만 강씨 일문(一門)의 영광이 아니요, 민족 전체의 자랑이라 우리 모두 민족의 영웅 앞에 예배(禮拜)하고 의기전통(意氣傳統)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해같이 영롱한 민족의 영웅이여 역사의 구름 뒤에 그 모습이 가리웠다 나타나 환하시오니 더욱 눈부십니다. 임유관 싸움터에 요하(遼河)의 파도 속에 수병(隋兵) 30만 명을 쓸 듯이 무찌르고 우리 님 개선(凱旋)하실제 그 영광 어떠하던고. 일천삼백년(1300년)이 바람같이 지나갔어도 장하신 그 이름 겨레 가슴에 새기옵고 피 끊는 의기와 전통 자손만대에 이어가리라.
【임유관전투 후 1379주년 되는 1977년 3월 문학박사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짓다】
참고 : 위의 글 중 마지막 부분에 봉덕사(鳳德祠)가 나오는데 봉산사(鳳山祠)인 듯하다.진주 봉덕사는 네이버와 챗GPT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으나 구글에서는 진주시 하대동에 위치한 진양 하씨(晉陽 河氏) 사직공파의 문중 사당으로 하륜(河崙, 1347~1416)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곳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1994년 발간된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1권에는 봉산사로 되어 있는 것을 나중에 확인함.
◇ 구보에 기록하기를 강이식(以式) 장군을 고구려 병마원수라 하고, 혹은 수나라 원수로 수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짐작하고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며, 수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신라의 원수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을 갔다고 하여 기록이 같지 않아 의심스러운 곳이 많으나 감히 삭제할 수 없어 등재하고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참고로 실었다.
◇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진(陳)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 다음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국서(외교문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긴 것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사람으로서 그 천성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使節)을 보내 조공하였으나 비록 번부(藩附 떨어진 지방)라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
고구려왕은 이미 짐의 신하로 짐의 덕을 배워야 함에도 말갈족을 핍박하고 거란족을 등용치 아니하고 신첩(臣妾)으로 만들고 짐에게 조공하는 일을 막다니 이 어찌도 해가 심한가, 작년에는 몰래 병사를 늘리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고구려가 영토가 좁고 백성이 소수이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속관(屬官)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짐의 충신이니 어찌 속관을 두랴. 고구려 왕은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요수(遼水 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강)가 넓다한들 장강(長江 양자강)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병사가 많다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어 힘들이지 않고 고구려를 멸할 수 있지만 순순히 타이르니 고구려 왕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 수나라 역사책에서는 “양량의 군사는 장마철에 질병을 만났고, 주라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할 때 사망자가 10중에 9”라 하여 “자연의 불가항력에 의해 패한 것이요, 고구려 군사에 의해 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체면을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이니 임유관 전쟁은 물론이요, 살수전쟁의 기록도 이 같은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것이 많다.
참고1 : 사적비명(事績碑銘)은 조상의 업적, 행적, 공적, 전설, 사적(事蹟) 등을 기록한 비문
참고2
▷ 병마원수(兵馬元帥) : 고구려 영양왕 시기(6C말 ~ 7C초)에 군사 총지휘관으로 대표적 장군이 강이식 장군이시다.
▷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 군사 병마 총괄하는 최고 지휘관. 강이식 장군은 598년 임유관전투, 612년 살수대첩의 영웅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