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보(乙丑譜, 南韓譜)는 1685년(이조 숙종, 을축년) 발간하였으며 비조이신 강이식 이후 천년이 지난 시점
□ 을축보(乙丑譜, 南韓譜) 서문(序文)
진산강씨는 우리와 같은 종족이다. 원수공(시조 강이식) 이후로 대대로 재상 등 벼슬이 이어지면서 나라의 대성(大姓)이 된 지 천여 년이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후손들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고 사촌이 재종이 되고 삼종으로 된 뒤로 차츰 멀어지게 되고 길가는 사람처럼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한 몸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어찌 차마 어리석게도 지금의 후손이 엣날 어느 어른에게서 갈라져 나온 줄을 알지 못하고 길가는 사람처럼 볼 수 있겠는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족보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선조를 생각하고 종족을 화목하게 하는데 관계됨이 적지 않은 것이다.
같은 종친 도사(都事) 석로께서 정성을 다하여 선조들의 세계(世系)를 상고(詳考, 참고)하여 차례를 정하여 족보 한 질(帙)을 편찬한 것은 우리 종중의 큰 다행이라 하겠다.
중국의 소노천이 자기들의 족보에서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는 사람은 효도하고 우애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쇠태하여 가는 오늘날에 진실로 이 족보로 말미암아 위로는 조상님들의 충렬을 사모하고 이를 본받아 떨쳐 일어날 것에 힘쓰고, 아래로는 자손들의 퇴폐한 풍속을 깨우쳐서 훌륭한 후손들이 나와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도록 기약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사씨(謝氏)네 집안처럼 훌륭한 자제들로 가득차고, 또 우공(于公)의 문중처럼 높은 수레를 타고 다니는 고관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니, 오늘과 같은 때를 옛날 성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자면 이 족보가 도움이 될 것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 노인들은 권고하고 젊은이들은 더욱 노력한다면 이 일이 어렵기만 한 것은 분명 아니다. 여러 종친들이 내가 나이가 많다하여 굳이 서문을 청하므로 마지 못하여 여기에 서문을 쓴다.
【세정미년(歲丁未年, 1667년) 청화(淸和) 하순에 불초후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강유(瑜)가 삼가 글을 짓다】
참고 : 강유(瑜)는 호가 상곡(商谷)이고 황해감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신 어른이시다. 정미년 청화라 적었는데 1600년대 정미년은 1667년인데 을축보 발간은 1685년이다.
□ 을축보(乙丑譜, 南韓譜) 발문(跋文)
족보는 없어도 될 것 같으나 없어서는 안 된다. 선조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서 어떻게 분파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종법(宗法)이 무너져 세상의 의리가 쇠퇴하게 되면서 초상이 나면 서로 안면이 없어 숙질인지 형제간이 되는지의 차례도 모르고 길가는 사람처럼 보는 일도 많다.종친 간에 윤리와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풍속도 하루가 다르게 야박하게 변하니 후세의 군자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이런 때에 족보를 만들어서 사람마다 자기들의 선조가 어디서부터 왔으며 또 어느 때부터 파가 갈라졌는지 알리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알려서 효제(부모형제간의 효와 우애)의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돈목(敦睦)하는 데에 힘쓰게 하며 그 돈목을 함에 있어 후한 것과 박한 것을 잘 가려서 균형을 맞추고 그 절의(節義)의 경중을 살피도록 하자면 족보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진산강씨가 명문세족(名門世族)이 된 지는 오래되었다. 대대로 벼슬하여 이름난 정승과 큰 벼슬들이 이어졌고 덕업(德業)이나 문장으로 이름난 분들이 역사책에 기록된 것이 사람들의 이목에서 빛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조상님들이 적선하여 음덕(蔭德)을 내려 주심이 아니겠는가?
우리 시조 원수공 강이식 이후 천여 년이 지나면서 세계(世系)가 많이 유실되었는데 이것은 족보가 전해오지 않은 상태에서, 없어도 된다고 하면서 족보를 만들지 않은데 원인 있지 않은가? 우리 종인 중에 심주(沁州, 강화도)의 경력(經歷)을 지낸 석로께서 선세의 사적들이 없어질까 두렵게 생각하고 후세 자손들의 사이가 소원(疎遠)해질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여 선조들의 세계(世系)를 자세히 상고(참고)하여 “진산세보(晉山世譜)”를 편찬하였다.
내용을 보면 먼 지방의 일가들까지 빠짐이 없고, 귀천(貴賤)도 가리지 않은 것은 일가들의 계통이 누락이 있을까 걱정되어서였고, 외손들은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타성(他姓)과 섞일까 염려해서이다. 원수공 이후 16세까지는 영남에 사시는 종인들의 가보를 보고 기록하였지만 대수가 그릇되고 이름자가 잘못 기록될까 염려하여 반드시 확실한 것만 기록하였고, 또 감히 빼놓을 수 없는 분들 중에 수록할 곳이 없는 중요한 분들은 시조 뒤에 별도로 기록했는데 그것은 의심은 나지만 있는 그대로 전하자는 뜻이었다. 아! 장하도다 공이 족보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썼는데 이것은 족보가 없어서는 안 되겠는 것을 보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족보의 편찬을 끝내고도 상자 속에 넣어두고 몇 년을 지내왔다.
요사이 장단부사(경기북부 장단지역 지방관)로 있는 석구는 석로의 동생인데 일찍이 호남의 무풍현감(무주 무풍 일대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영호남에서 수령으로 있는 분들과 몇몇 종인들이 인쇄에 붙이는 것을 서로 상의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항상 서글프게 생각하다가 장단부사가 되고서야 형이 시작한 족보를 마무리 발간하게 되었다. 천년 동안 이루지 못한 족보를 형이 시작하여 동생이 끝낸 이 족보를 오래오래 전하게 되었으니 그 공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할만하다.
족보는 그 족(族을) 합(合)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 종친들이 이 족보를 보게 되면 모두가 능히 그 소자출(所自出)과 소유래(所由來)를 상세히 상고할 수 있을 것이며 나의 몸이 한 할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을 알 것이다. 이래서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같은 종친들 끼리 돈목(敦睦)에 힘쓰고 조상님의 가훈을 실추시키는 일이 없어야 하며 이 나라에서 대성(大姓))으로서의 명성을 영원히 세우도록하기 위해서는 물러나 집에서는 수신제가하고 조정에 나가서는 나라에 시책을 펴서 예악(사회질서와 개인 수양을 위한 예)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고 당세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을축년(乙丑年, 1685년) 천중절(단오)에 통훈대부, 전행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강석규(錫圭)가 삼가 글을 짓다】
참고 : 심주(沁州, 강화도)의 경력(經歷)이란 조선시대 강화도 관서에 소속되어 기록 회계 등 실무를 총괄하는 종4품 문관직이다.
□ 을축보(乙丑譜, 南韓譜) 발(跋)
우리 진산강씨는 세상 사람들이 명망이 있는 가문이라 불렀는데 족보가 전해오지 않아 근원을 증거할 수 없어 종문(宗門)의 일가들이 걱정해 온 지 오래다. 그러다가 우리 형님 경력공(經歷公) 석로께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일가들을 모아 합하는 족보를 만드는데 뜻을 두고 전국 각지의 개인들의 기록을 수집하여 그 세수(世數)와 차서(次序)를 고증하고 파별로 분류하여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고찰하고 거기에서 내려온 내력도 소상하게 밝히는데 수 년의 세월이 걸렸으니 그 고생함이 많았다.
그러나 개인의 힘만으로 인쇄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내가 장연현감으로 부임한 후로 나의 봉급을 떼어내고 다른 곳에서 재물을 모은 다음 인쇄공들을 모아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한 일로 파직되어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강도(강화도)에서 형님 석로가 계속 인쇄를 진행해 판수(板數)가 77판이었고 엽수(葉數, 페이지)로는 153분에 이르러 상하 두 권으로 발간했다. 이 족보를 보면 어느 조상으로부터 내 몸이 생기게 되었는지의 소자출(所自出)과 어느 파의 유래(由來)가 책을 열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수십 대를 내려온 종계(宗系)의 파가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었다. 궁벽한 산촌에 흩어져 사는 종인들 중에서 누보(漏譜)가 되었다는 탄식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추보(追譜)가 간행될 때 입보(入譜)되도록 하는 수밖에 없고 그 외에도 어찌 이런 종친들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족보 발간 사업이 거의 다 이루어짐에 그 전말을 내가 알기 때문에 권말(卷末)에 이와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종족(宗族)에게는 족보가 있는데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자기의 근원과 내력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서 형제가 갈라져 자식을 낳으면 사촌이 되고 그 사촌들의 자식은 재종(6촌)간이 되고 그 재종들의 자식들은 삼종(8촌)간이 된다. 그렇게 점점 멀어지다가 무복친(無服親, 초상 때 상복을 입지 않음)이 된다. 그런데 족보가 없다면 그 이름이나 그 종파의 나누어짐을 알 수가 없다. 이래서 종족들에게 족보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진산강씨는 큰 성씨이고 고려 조에서는 이름난 재상이나 벼슬아치가 대를 이어 나와 후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종인(宗人)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각자가 사는 곳이 달라 서로 상면하는 일조차 없으니 이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가까운 사이인지 먼 사이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다면 어찌 같은 종족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여 여러 일가들이 가지고 있는 기록들을 찾아 참고하고 널리 찾아다니며 기록을 찾아서 거기에 보태고 하여 수년 만에 한 권의 족보를 편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자기의 선대(先代)는 물론이고 방친(傍親)의 사적까지 일일이 기록하여 일가라면 누구나 찾아볼 수 있게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또 한 몸에서 갈라져 나와 나누어진 것을 알면 효제(孝悌)하고 화목하고 싶은 생각이 저로 들 것이다.
진산강씨에 전해오는 설이 있는데 원래 양파(兩派)가 있는데 모두가 진산을 관향으로 쓴다. 우리 박사공파와 은열공 강민첩의 후손이라는 파가 있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은열공(강민첨)파와 어사공(사첨)파는 형제간이라고 하나 은열공은 고려 초기(서기 963~1021년)의 분이시고 어사공은 고려 말기(서장관, 1274년)의 어른이시다. 그 햇수의 차이가 수백 년이나 된다. 그러나 성씨가 같고 관향까지 같으니 같은 시조(강이식)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으나 믿을 만한 문헌도 없으니 상고할 길이 없어서 합보(合譜)도 못하고 있으나 만나면 종친의 도리로 서로 친하게 지낸다면 거의 옳을 일이다.
【임인년(壬寅年) 중춘(1662년 2월)에 통훈대부, 행의금부도사 : 국가의 주요 형벌 담당) 석로(碩老)가 재배하고 삼가 기록한다】
(참고 : 은열공 강민첨은 고려시대 1019년에 강감찬과 귀쥐대첩에서 거란족을 격파한 바 있고, 어사공 강사첨의 아버지 급사공(강인문)은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하러 갈 때 서장관으로 아버지(강계용)를 따라 가셨으니 고려 원종 갑술년(서기 1274년)이다. 약 250여 년이란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