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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봉란대(鳳卵臺)의 유래 : 진주강씨 구기택지(舊基宅誌)

  봉란대(鳳卵臺)를 알기 전에 먼저 姜氏 구기택지에 대한 내력을 알아야 한다. 대봉산(大鳳山)은 진주(晉州)의뒷산, 지금의 비봉산(飛鳳山)이요 봉곡촌(鳳谷村)은 지금의 진주시 상봉동동(上鳳東洞)과 상봉서동(上鳳西洞)의 두 동을 합친 마을 이름이다. 옛날 이 봉곡촌에는 우리들의 조상님들께서 스스로 마을을 이루고 姜氏들만이 집단으로 사셨다고 한다. 이 봉곡촌(鳳谷村) 택지(宅誌)를 이야기하려면 우리 晉州姜氏의 흥망성쇠와 파란곡절이 얽히고 섥힌 대봉산(大鳳山) 봉지(鳳池, 봉의 연못, 즉 봉서지), 봉암(鳳岩, 봉바위), 봉란대(鳳卵臺, 봉알자리), 봉강재(鳳降齋)의 피눈물 나는 사연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우리 姜氏들이 정부 요직 높은 벼슬자리에 많이 계셨기 때문에 세도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영상서(領尙書, 상서성의 최고 책임자) 정절공(正節公) 휘 구만(九萬, 931975)할아버지의 집(봉곡촌)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이 큰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바위가 얹혀져 있어 보기에 크고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흡사 봉(, 봉황)의 형상과 같으므로 칭하기를 봉바위(鳳岩)라 하였다.
  어느 날 강남도사(江南道士)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바위를 보고 하는 말이 "강씨지대성(姜氏之大盛)이 유차암고야(有此岩故也)" 姜氏들의 대성함이 이 바위로 인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그 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서성의 최고위직 장관),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문하성의 최고 책임자로 중서령中書令과 함께 양부兩府 재상宰相), 평장사(平章事, 문하시랑평장사로 문하시중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재상) 휘 홍(, 10101122)할아버지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형제 열 한사람이 경상(卿相, 정승판서)으로써 한나라의 정권(政權)을 한 문중에서 장악하다시피 하였으니 그 부귀(富貴)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摩)격으로 남이 잘되는 일에 시기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합문지후(閤門祗候, 왕실의 조회 연회 등 의례를 집행하며 왕의 출입을 관리하는 담당) 이지원(李之元)이라는 자가 그 세력을 시기하여 임금에게 강씨(姜氏)를 모함하여 사람을 시켜 몰래 봉바위를 부수니 그 바위 속에서 함박같이 생긴 흰돌 네개가 들어 있어 이를 철추(鐵椎)로 부수니 새빨간 피가 흘렀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인종 때에 척준경(拓俊京)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상서 강홍(尙書 姜洪)의 형제들 일당이 불의의 앙심을 품고 있으니 속히 조처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인종(仁宗) 임금은 깜짝 놀라면서. " 어떻게 하면 강홍(姜洪) 일가의 세력을 꺽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니 척준경은 말하기를 "강홍(姜洪)과 그의 도당(徒堂)을 내치시고 그들의 향토(鄕土) 진주의 명소(名所) 지명을 고치소서." 하니 인종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상서공(尙書公) 강홍(姜洪)의 형제와 일족을 죽이고 대봉산(大鳳山)의 이름을 봉을 날려 보낸다.뜻으로 비봉산(飛鳳山)으로 고치고, 봉지(鳳池, 봉 연못)의 명칭을 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뜻으로 부지(釜池, 가마못) 이라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씨(姜氏)들은 한순간에 망하고 말았다. 남에게 나쁜짓을 한 자는 그 댓가를 받는 법이라, 척준경도 그 후 1126년에 반역(返逆)을 도모하다가 실패하고 그도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많은 후손들이 번성하고 권력도 회복되어 전날의 선조들의 세도를 꿈꾸게 되었다.

진주강씨 중앙종회

 

참고 : 구기택지(舊基宅誌, 특정 가문이나 인물의 옛 집터와 그 내력을 기록한 문헌이나 기록)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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