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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급사공(引文, 진주강씨 박사공파 2세)의 새로운 사적

  박사공(휘 계용)의 아드님이신 전중(殿中) 내급사공(內給事公, 引文)이 복야(僕射 고려 정2품 정승)를 지낸 진양(晉陽) 하공(河公)과 종유(從遊: 학덕이 있는 사람과 교류)한 기록이 진양 하씨(晉陽 河氏) 경태보(景泰譜, 1451년 간행) 서문에 실려 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선생이 지은 공목공(휘 시)의 묘지명에 내급사공은 1274(고려 원종)에 원나라(몽고)의 제1차 일본 정벌에 아버지 박사공(휘 계용)을 동행하여 온갖 위험 끝에 무사히 귀국하였으나, 7년 후인 1281(고려 충렬왕) 5월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할 때 아버지에 이어 고려군 도원수 김방경(金方慶)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기용되어 또다시 동정(東征)에 나서게 되었다.

내급사공이 한차례 일본을 다녀왔으므로 일본 지리를 잘 안다 하여 다시 기용된 것이다. 10만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일본 하까다(博多)에 상륙하려다 또다시 폭풍우를 만나 싸우지도 못하고 수차 죽을 고비를 겪고 귀국하여 후손들에게 "내가 학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처럼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도 다시는 선비의 재주를 나타내지 말라(물업유술:勿業儒術)."라는 말을 남겼다.

  내급사공은 귀국하여 공목공의 묘지명에 실려 있는 기록대로 더 이상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아 벼슬은 비록 내급사에 머물렀지만, 만년에 하정승(河政丞)과 시를 주고받은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 우리 강문(姜門)은 상당한 문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양 하씨(晉陽 河氏) 경태보(景泰譜) 서문

서문 발췌(拔萃)  “또 강급사공(姜給事公, 引文)이라 하는 분이 우리 선조에게 시()를 지어주면서 하(河) 복야(僕射)라 일컬은 일이 있는데 (하 복야의) 이름자를 모르니 한스럽다.”

경태(景泰) 2년 신미년(辛未年) 영의정부사 경재(敬齋) 하연(河演) 짓다

 

참고 :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6) : 영의정, 근검 청백의 표상, 문집 '경재집(敬齋集)'

 

내용의 오해(誤解)와 한자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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